욥기 42장
욥의 반응: 복종 (42:1~6)
욥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불평과 무죄 맹세에 대한 대답으로 받아들인다. 욥은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서는 확신 있게 말했지만, 정의의 기준과 반대되어 보이는 예들 속에서 하나님의 일관된 정의 실현에 의문을 가졌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 그는 여호와의 지혜와 정의로운 세상 통치를 확신하게 되었다. 여호와의 주권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된 욥은 여호와의 계획(מזמה, purpose, detailed plans)은 어떤 것도 좌절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인한다(2절). 이는 주님의 지혜의 틀 안에서 세상에서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세상 창조의 놀라움에 직면한 욥은 모든 것이 너무 기이해서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이해 밖에 있으며 여호와는 우주 통치에 진정한 정의를 행하신다는 것을 깨닫는다. 욥은 여호와께서 처음에 하신 고소(“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를 자기를 비판하는 말로 고쳐 말하므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복종을 표현한다(3절).
이는 하나님이 불의하게 통치하신다는 불평 속에서 그가 자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넘어서는 것을 말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일들에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나은 통찰력을 가졌다고 주장함으로 오만의 죄에 다가갔다. 욥이 여기서 죄를 고백하지 않은 것을 볼 때 그가 고난을 받을만한 죄를 짓지 않았고 그가 호소하는 중에서도 죄를 짓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는 자기 확신이 교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위험을 욥에게 알게 하신다. 욥은 자기 확신으로 인해 그의 무죄를 열렬하게 강조했기 때문이다. 여호와에 대한 강한 불평 속에서 욥은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다는 교만에 가까이 가는 위험 속에 있었다. 무죄 맹세를 강하게 주장하면 할수록 교만으로 나아가는 죄를 짓게 된다. 하나님이 정의를 행하시지 않는 것 같다는 지속적인 주장에 내포된 위험을 알게 된 욥은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상황을 틀리게 말한 것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선다.
욥은 겸손함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본질적인 것임을 확인한다. 이러한 인정은 그가 개인의 유익이나 이익을 위해서 또는 자신의 의로움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을 나타낸다. 사탄의 도전 앞에서 자신의 종에 대한 여호와의 확신이 완전히 변호되어졌다.
4절은 여호와의 말씀을 반복하는 것(38:3; 40:7, I will ask you, and you instruct Me)으로, 이 문맥에서 해석하기 어렵다. 이전에 욥이 자신이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자신의 불평에 대답해주실 것을 요청했었다(13:22). 지금은 여호와께 그가 하는 응답을 들으실 것을 요청한다. 아마도 하반절은 법정에서 사용하는 듣기를 요청하는 공식적인 말일 수도 있다. 이 구절은 욥이 6절에서 하게 될 무죄 맹세의 철회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전에 욥은 조상의 가르침이나 전통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 들은 것을 즐거워하며 교훈에 따라 열심히 살았다. 이제는 믿음의 더 큰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직접적인 만남을 가졌고 그의 말씀을 분명하게 들었다(5절). 하나님이 자신을 폭풍우 속에 자신을 가리심은 시내산에서 나타나실 때(출 19장)와 많은 면에서 비슷한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의해 욥이 소멸되지 않도록 자신을 가리셨다.
그러나 욥이 자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셨다. 자신의 눈으로 구속자를 보기 원했던 욥의 깊은 갈망이 채워졌다(19:25~27). 여호와의 나타나심으로 욥은 압도되고 놀라움과 경이로 가득 차서 자신의 모든 불평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또한 여호와께서 욥에게 나타나심으로 욥의 의로움을 변호해주셨다.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מאס, to reject, refuse, despise)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נחם, to be sorry, have compassion, repent, be comported)
[NASB] Therefore I retract, and I repent in dust and ashes.
[ESV] therefore I despise myself, and repent(am comported) in dust and ashes.
[Hartley] Therefore I abase myself and recant in dust and ashes.
ESV는 자신의 말이 무식했음을 인정하며 티끌과 재에서 위로를 받는다고 볼 것을 제안한다. 2:11에 친구들이 위로하려고(נחם) 왔을 때와 같은 단어인 것에 근거하여 친구들에게서 받지 못했던 관계의 화목으로 인한 위로를 누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Hartley] 욥은 자신이 앉아 있는 티끌과 재보다 더 나은 존재가 아님을 고백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부인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한 진정한 평가를 갖게 된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에 남아있는 의인을 위해 중보 기도할 때 자신을 가리킨 말과 유사한 말을 사용한다(창 18:27). 욥은 자신의 잘못된 교만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진실로 정의로우시므로 그가 성 밖 티끌과 재에 앉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
“회개하다”(נחם)는 말은 어떤 행동의 계획된 방향에서 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을 취한다는 뜻이다. 이는 후회나 죄책감 등의 태도가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가장 강한 결심을 암시한다. 무죄 맹세를 철회함으로 자신이 의롭다고 한 것을 하나님께 돌린다. 자신의 도덕적 행동이나 무죄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와의 관계 위에 자신의 가치를 두게 되었다.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한다는 말은 초월자이신 여호와 앞에서 욥이 단순한 피조물로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을 암시한다. 욥이 피조성을 인정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비추어본 자신의 무지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무가치함을 고백하는 욥은 자신이 변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부터 하나님 앞에 그의 마음을 준비해야 할 필요성으로 관심이 바뀐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고난으로부터 벗어남보다 그에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위해 불평한 것, 심지어 하나님께 한 것이라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무죄 맹세를 한 것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옳다는 생각을 끝까지 추구하려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상처 받은 사람 사이에 장벽을 세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실 때 죄를 짓지 않도록 하나님께 정당한 불평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양도해야 한다. 욥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게 여기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는 모든 주장을 철회한다.
결말: 욥의 변호, 중보기도와 회복 (42:7~17)
하나님께서 세 친구를 책망하심 (42:7~9)
결론 부분에서 여호와께서는 주요 등장인물들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소개하심으로써, 이 단락이 욥기 전체를 해석하는 기준이 되게 한다. 욥기는 보상 교리를 결코 배척하지는 않지만, 그 교리의 잘못된 적용(고통은 그 고통을 겪는 자가 범죄 했음을 나타내는 최종적인 증거라는 견해, 의인은 항상 형통함을 누리지만 악인은 항상 신속하게 처벌을 받는다는 견해)을 바로잡기 위해서 노력한다. 대화 부분이 고통을 죄의 필연적인 결과로 보지 않으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반면에, 결론 부분은 욥의 형통함이 여호와의 자유로운 선물이지 믿음으로 고통을 이겨낸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욥을 위로하러 온 세 친구들 중 대표자인 엘리바스에게 하신 말씀 속에서 여호와는 욥에게 한 그들의 가르침과 호소에 책임을 지게 하신다. 그들이 여호와에 대해 말한 것이 욥의 말처럼 옳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신다(7절).
여호와는 욥은 지혜를 어둡게 한다고 고소하셨지만(38:2) 친구들에 대한 것은 더 강하다. 욥은 진리를 진정으로 찾아나갔지만, 친구들은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노력으로 잘못 말했다. 욥을 위로하는 것에 실패한 것보다 더한 것은 그의 고난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간 삶 속에서의 구속의 사역을 부인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는 고발을 당한다.
7, 8절에서 여호와께서 욥을 “내 종”이라고 부르는 것이 4번 나온다. 이는 하나 된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며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명예로운 칭호이다. 사탄과의 대화에서 여호와께서 욥에게 사용한 칭호로(1:8; 2:3) 이를 다시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자기 부인을 인정하시고 고난 이전의 높은 위치를 허락하심을 보여준다. 욥은 자신을 고발한 친구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드림으로 중재자의 역할을 재개한다.
하나님께서 욥을 회복시키심 (42:10~17)
욥이 여호와께 복종하고 그의 명령을 따라 그의 ‘위로자들’을 위해 은혜롭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욥의 소유를 회복시켜주셨다. 욥의 소유가 갑절로 주어진 것은 그가 합당하지 않은 고난을 견딘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자유롭게 풍성하게 그를 축복하셨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뜻) 속에서 그의 신실한 종들이 일정 기간 고통을 당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러나 때가 되면 완전한 치유(total healing)를 주신다.
악의 문제를 놓고서 고민하는 자들을 위하여 욥은 흔히 제시하는 부적절한 답변을 넘어서서 여호와의 초월적인 힘과 지혜의 신비에 초점을 맞춘다. 욥기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도리어 사람이 얻을 수 없는 답변을 유일하게 알고 계시는 여호와께 관심을 쏟게 한다.
욥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그의 길들을 이해할 수 없는 때조차도 여호와를 신뢰하게 만든다. 인간은 충분한 설명이 없을 때조차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인간은 신비로운 차원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부당한 고통의 이유에 대한 질문들에 침묵으로 답을 주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유한성으로 인하여 영원의 시각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해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의 침묵이 그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님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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