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에게 대답하라는 하나님의 요청 (40:1-2)
계속 질문했던 욥은 이제 질문을 받는다. 여호와는 욥의 불평의 의미를 정확히 지적하는 날카로운 질문을 하신다.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끈질기게 변호햇던 것은 하나님이 고치셔야 한다는 것을 암시했다.
첫번째 말씀(38-39장)에서 자신의 위치를 보이신 하나님은 이제 고쳐야 할 부분에 대해 욥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신다.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2절). 하나님이 친히 하신 질문이나 주장에 대해 대답함으로써 과연 하나님이 고쳐야 할 것이 있는지를 보여 달라고 욥에게 반격하신다.
욥은 질문들에 답변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여호와의 탁월한 지혜를 신뢰하든지, 아니면 질문들에 답변함으로써 자신이 여호와께 책임을 물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입증해야 했다.
40:2 트집 잡는 자(יסור, 욥 40:2에만 나옴, faultfinder)
욥의 반응: 침묵 (40:3~5)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에 압도당한 욥은 스스로 자신의 작음(insignificance)을 인정하고 자신을 “비천한 자”로 고백한다(4절). 그의 무죄 주장과 불의(정당하지 않게 고난을 당함)에 대한 항의 및 하나님의 답변을 바라는 요구는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요 감히 할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대답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시인한다. 욥은 여호와의 세계 안에 자신의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광대한 차원이 있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도 그처럼 신비로운 영역에 속한다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이전 주장들을 더 이상 내세우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친구들이 비난한 대로 자신을 범죄한 자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욥의 답변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그가 여호와와 논쟁을 벌이는 태도에서 침묵을 지키는 태도로 전환했다고 본다. 하나님이 40:6-41:34에서 제2회전의 질문들을 하시고, 이에 대한 욥의 답변이 42:15에 나온다. 더 이상 답변하지 않겠다는 표시로 손으로 입을 가린 욥은 자신이 이미 여러 번 말했으므로 이제 더 이상 발언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을 취소하지도 않을 것이요, 자신의 무죄 주장을 되풀이하지도 않을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두 번째 도전: 정의와 능력을 이해함 (40:6~41:34)
여호와의 두 번째 말씀은 여러 짐승들을 간략하게 개관하기보다는 두 종류의 짐승들에게만 집중함으로써 첫 번째 말씀보다 더 집약적인 모습을 보인다. 첫 번째 말씀은 생생하면서도 간결하게 일련의 표상들을 순식간에 보여줌으로써 우주의 파노라마를 만들어내지만, 두 번째 말씀은 욥이 주의를 집중하여 정밀한 묵상 작업을 하도록 이끈다.
욥의 능력에 대한 질문 (40:6-14)
8절에 중요 쟁점이 나타난다.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욥이 옳다고 인정하기 위해 하나님이 불의하게 되셔야 하는가?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그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 항의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불의하게 행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보상 신학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빼앗아가셨다고 말함으로써(27:2) 하나님을 희생시키고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의로운 삶을 살았음을 인정하시면서 그에 대해 죄가 있다고 고소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의 종과의 관계가 회복되려면 자기 의로움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이 잘못하신다는 욥의 태도는 변화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세계 통치에 대한 불평은 정정되어야 한다.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잇느냐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9절)는 질문은 욥의 무죄 맹세와 하나님께 대한 불평이 그가 하나님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의미라는 것을 보여준다. 욥이 더 많이 안다면 그가 가진 목적에 따라 다스릴 능력이 있어야 한다. 통치의 능력이 잇다면 왕의 상징인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고' 우주를 통치해보라는 것이다(10절). 그가 우주를 다스릴 능력이 잇음을 증명한다면 하나님이 그의 불평을 인정하실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욥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11-14절에서는 욥이 자연계를 통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인 판단 역시 행사할 수 없음을 암시하신다. ‘교만한 자와 악인을 발견하여 낮추고 짓밟고 은밀한 곳에 두라’는 것은 정의를 굽게 하는 자들을 심판함으로써 강하고 교만한 자들에게 권세를 행사해보라고 욥에게 도전하시는 것이다.
13절의 “그들의 얼굴을 싸서 은밀한 곳에 둘지니라”의 얼굴은 한 사람 전체에 대한 환유법이다. 은밀한 곳은 무덤을 말한다. 교만한 악인들에게 그의 분노를 폭발시킬 때 욥은 그들을 죽음에 처해야 한다.
욥이 자신의 힘과 영광으로 우주의 모든 것들을 창조하고 유지할 수 있는가? 나아가 욥은 악을 최종적으로 붕괴시킬 힘을 가지고 있는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욥은 도덕적인 영역에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의 최고 주권에 자신을 맡길 필요가 있다. 욥은 세계 안에서 엄격한 보상 개념을 적용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여호와께 잘못이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정의의 궁극적인 실현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베헤못(Behemoth) (40:15-24)
이 짐승의 정체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지상의 동물에서부터 신화적 괴물이라는 견해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사실적이고 자세한 묘사는 신화적 존재라고 보기 어렵게 한다. 여기서 분명히 밝히는 것은 "네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15절) 즉, 베헤못과 욥이 똑같이 여호와의 피조물이라는 점이다. 이 거대한 피조물은 강력한 신체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며(16-18절), 하나님이 만드신 짐승들 중의 으뜸으로 묘사된다(19~22절).
또한 베헤못은 소용돌이치는 강물 앞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며(23절)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짐승이지만(24절), 여전히 창조주이신 여호와의 지배하에 있다. “그것을 지으신 이가 자기의 칼을 가져 오기를 바라노라”(19절)는 오직 창조주만이 그의 칼을 가지고 베헤못에게 접근할 수 있음을 말한다. 칼을 가지고 접근하는 행동은 이 짐승을 완전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이다. 하나님만이 완전하게 베헤못을 다스리신다.
여호와는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이 짐승을 만드신 분이요, 다스리시는 분이다. 여호와는 첫 번째 말씀에서 언급하신 짐승들보다 인간이 더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더 잘 조종하지도 못하는 베헤못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오직 하나님만이 세계를 통치할 권능과 지혜를 소유하고 계신다는 교훈을 더욱 확실하게 욥에게 전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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