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속의 길

사무엘하10장-12장 암몬과의 전쟁 다윗과 밧세바

독거할매 2021. 4. 6. 23:26

사무엘하 10장(암몬과의 전쟁)

10장은 11장의 사건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 되기 때문에 암몬과의 전쟁은 8장과 다른 문맥에서 다루고 있다. 이 사건은 밧세바의 사건의 하나의 배경을 이루는 관점으로 다루고 있다. 이제까지 다윗은 자신이 친히 전쟁에 나가는데, 여기서는 다윗은 나가지 않는다.

전쟁의 발발(삼하 10:1-5)

다윗과 나하스 사이는 상당히 우호적인, 동맹관계가 맺어졌던 것 같다. 그래서 나하스가 죽었을 때 위로하면서 나하스와 맺었던 좋은 외교적 관계를 계속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사절단을 파송한다. 그런데 암몬 왕 하눈이 다윗의 의도를 곡해하고 나하스의 아들 하눈이 다윗의 사절단을 모욕해 쫓아낸다.

암몬과의 전쟁(삼하 10:6-14)

암몬은 다윗이 강한 상대인 것을 알고 주변 나라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때 다윗은 자신이 직접 전투에 나가지 않고 요압을 보내고 자신은 예루살렘에 남는다. 다윗이 아람 연합군을 물리침(삼하 10:15-19).

사무엘하 11장(다윗의 범죄)

11장은 네 개의 사건으로 구성되어진다. ① 밧세바와의 간음(2-5절) ② 잘못을 감추려는 다윗의 시도(6-13절) ③ 잘못을 감추려는 세 번째 시도(14-25절) ④ 밧세바를 아내로 취함(26-27절).

밧세바와의 사건(삼하 11:1-5)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이것이 결국은 다윗에게 엄청난 실수를 하게 한 시발점이 된다. 이 표현 가운데는 다윗이 마땅히 전투에 참여했어야 했다는 저자의 평가가 암시되어 있다. 다윗이 뭔가 안일해져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미 마음이 방심해져 있었기 때문에 죄의 유혹이 다윗을 무너뜨릴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이 유혹에 굴복함(11:2-5)

아담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보는 것에 걸려 넘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밧세바가 의도적으로 다윗을 유혹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11:4-5 (다윗이 밧세바를 취함)

밧세바의 목욕은 정결의식이 아니었나 보여 진다. 의도적 유혹 행동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한 밧세바가 임신 가능한 기간이었음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우리 아이 아이가 아니라 다윗과의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진 아이임을 암시적으로 저자는 밝히고 있다. 5절은 이 사건이 미친 파괴력이, 그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보여 주고 있다.

 

범죄를 감추기 위한 두 번의 시도(삼하 11:6-13)

다윗의 비열한 모습이 부각되어 있다. 다윗의 이러한 모습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의 모습과 대조되고 있다.

 

11:6-7(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소환함)

전쟁 상황을 보고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로는 밧세바의 아이가 우리아의 아이임을 꾸미기 위한 목적이다. 다윗이 은폐를 시도하는 것은 외부 사람들이 모르게 하기 위해서. 잘못 그 자체보다 이것이 더 가증해 보인다. 우리아를 위한 척하면서 다윗은 오히려 자신의 범죄를 감추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아는 언약궤를 언급하며 이를 거절한다. 야웨께서 직접 전쟁에 참여하고 계시다는 의미. 이 전쟁을 야웨 전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윗은 우리아로 하여금 율법 규정을 어기도록 하고 있다. 우리 아는 다윗에게 충성스러운 신하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히 지기키고 있는 백성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면 다윗은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도록 조장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잘못을 감추려는 세 번째 시도(삼하 11:14-25)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려는 계획(삼하 11:14-15)을 세운다. 편지의 내용은 우리아를 싸움에서 죽게 하라는 것으로 잔인하게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아의 손을 통해 전달케 한다.

 

요압이 다윗의 명령을 수행(11:16-17)

적들이 진을 치고 있는 성읍 중에서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장소, 가장 용맹스러운 적장들이 버티고 있는 곳으로 우리아를 몰아낸다. 의도적으로 우리아를 죽음에 몰아넣는 요압의 모습이다. 우리아의 생명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요압. 장수로서의 책임을 요압이 다 하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이 사건을 기술하면서 요압의 비열한 모습도 같이 공범자로 부각하고 있다. 요압의 이런 모습은 나단 선지자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요압이 우리아의 죽음의 소식을 전함(11:19-21)

요압은 다윗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20절). 우리아의 처를 아내로 삼음(삼하 11:26-27) 남편을 잃고 나서 애도의 기간이 지나자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온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남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은 것이다. 다윗이 바뀌어져 있는 것이다. 충실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에서 폭군, 전제군주의 모습으로.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보이지 않고 있다.

 

사무엘하 12장(나단의 책망과 하나님의 징계)

나단의 비유(삼하 12:1-4)

나단의 책망과 하나님의 징계 단락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모든 행동을 보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문제에 개입하고 계신다. 다윗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보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완전한 재판관이 되시고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판결하는 것이다. 나단의 비유는 다윗의 밧세바를 취한 행동을 암시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나단은 이 비유를 통해서 다윗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범죄 한 다윗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스스로 심판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윗의 반응(삼하 12:5-6)

그 대상이 사실은 자기 자신인데. 다윗은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사형 판결을 내리고 말았다. 다윗은 마땅히 죽어야 할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단의 선고(삼하 12:7-12)

다윗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것이다. 본질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상실한 것이다.

 

다윗의 회개(삼하 12:13-14)

다윗은 즉각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13절). 다윗은 여러 차례 실수를 한 적이 있지만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한 때 죄의 유혹이 만들어 낸 덫에 빠졌었지만, 그 이후 솔직하게 자신의 죄를 시인한다.

 

아이의 죽음과 다윗의 반응(삼하 12:15-23)

아이의 실재 나이는 알 수 없다. 아픈 지 7일 만에 죽었다. 다윗이 금식하면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다(16절). 하나님 앞에 겸비한 다윗의 모습으로의 복귀다. 다윗은 자신의 한 행동에 대해 스스로 설명한다(20절).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다윗의 신앙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죄의 결과임을 알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결국 아이가 죽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윗의 성숙한 신앙이 잘 나타나 있다.

솔로몬의 출생(삼하 12:24-25)

솔로몬의 탄생은 다윗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전의 친밀한 관계로의 회복, 바람, 상징적 의미. 학자들은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히브리어 <살렘>과 관계되어 있다고 본다. <대신하다>는 뜻이다. 솔로몬의 출생은 다윗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징표다.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 솔로몬의 이름을 여디디야로 지어준다.

 

 

신학적 적용 및 메시지

 

다윗의 일생에서 가장 잘 나가던 시점에 범죄 하였다. 대적들을 물리치고, 정치적으로 안정을 취하던 시절에, 자신도 모르게 교만한 마음이 생긴 것이다. 모든 불행의 뿌리, 그것은 교만이다. 많은 사역자들도 사역 초기보다는, 어느 정도 사역이 안정권에 들어 선 이후에, 많은 실수들을 범하는 것을 본다. 리더에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행사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우리의 왕 되신 하나님보다는 나의 왕 됨에 도취되어 작은 죄들에 대해 민감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하나님 앞에서 섬세한 영혼, 그 분만이 왕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으로 서야겠다.

 

 

한국교회와 교회 지도자의 도덕성에 대한 불신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부터 떠나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외형적으로는 화려해졌지만,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은 하지 못하고, 도덕적 둔감함에 길을 잃은 한국 교회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신앙으로 회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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